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라타 제국 (문단 편집) === 절정기, 위태로운 승리들 === 18세기 중반까지 인도 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마라타 제국이었지만, 그 시기는 서양의 강력한 [[대영제국|영국]]의 세력이 인도로 뻗어오던 시기였다. 인도 반도의 관점에서 영국(영국 동인도회사)은 원래 17세기 중반부터 남동인도의 [[첸나이]](마드라스, 1639년부터 점유, [[비자야나가르 제국]] 지방관의 승인으로 획득)와 남서인도의 [[뭄바이]](봄베이, 1661년부터 점유, [[포르투갈]]로부터 [[찰스 2세]]와 [[브라간사의 캐서린]]의 결혼 [[지참금]]으로 넘겨받음)를 거점으로 삼고 무역을 하던 세력이었으나, 18세기 중반 [[벵골]] 지역의 지방정권을 굴복시키고 사실상 벵골을 점령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마이소르 왕국]]과 전쟁을 하고 하이데라바드 및 카르나타카에도 개입하는 등 이제는 남인도, 동인도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마라타는 18세기 중반의 확장기까지는 영국과 별다른 정치적 대립이 없었지만(벵골과 오디샤에 대해 간접적인 알력이 있기는 했다), 이때부터는 영국과의 관계가 마라타의 흥망에 주요 변수로 떠오르게 된다. 1772년 마라타 제국 내부에서는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사망하고, 바지라오의 손자 나라얀라오가 페슈와가 되었으나, 나라얀라오와 라구나트라오가 페슈와직을 놓고 치열한 권력 투쟁을 전개한다. 처음에는 라구나트라오가 나라얀라오를 암살하고 페슈와 자리를 차지하는가 싶더니(1773), 부정한 방법으로 자리를 차지한 라구나트라오에 대한 반발로 라구나트라오는 마라타의 조신들에 의해 1년 만에 자리에서 쫓겨나고 나라얀라오의 젖먹이 아들 마다브라오 2세(1774 ~ 1795)가 명목상의 페슈와로 옹립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마라타 제국은 페슈와 중심의 체제에서 마다브라오 1세가 임명한 지방관들의 독립성이 강해져 지방분권적인 연맹체(마라타 연합, 마라타 동맹)로 변하게 된다.[* 마라타 동맹에 속한 대표적인 세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푸네]]의 페슈와를 중심으로 한(페슈와는 푸네의 재상궁에 거주했다) 중앙정권, 괄리오르의 신데 가문 세력, 구자라트의 바로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에크와드(가이크와드, 가이콰드) 가문의 세력, [[인도르]]의 홀카르 가문 세력, [[나그푸르]]의 본슬레 가문 세력 등등. 이 외에도 군소 지방관이 왕조처럼 통치한 지역은 더 있었다.] 그런데 이때 권력 중심에서 밀려난 라구나트라오의 일파가 [[봄베이]]에 있던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기회다 싶었던 영국은 이에 응하고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1775 ~ 1782)'''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끼어들어 [[대영제국|영국]]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다.[* 프랑스가 마라타 측에서 참전한 것은 아니다.] 잠시 권력 투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고는 해도, 다시금 강성해져 있던 마라타 동맹은 출중한 장군 마하다지 신데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영국과 맞섰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의 방해도 있는데다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과도 맞물려 있던 관계로 힘겨운 상태였고, 결국 1782년 당시 영국의 초대 인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마라타와 '''살바이 조약'''을 체결하고 야무나 강을 경계로 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점령한 영토를 마라타에 반환했고, 대신 마라타는 영토 내에 프랑스의 항구 설치를 허가하지 않기로 약조하였다. 영국과의 영토 문제에서 합의를 본 마라타의 마하다지 신데는 무굴 제국 황제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직을 수행하며[* 갑자기 무굴 제국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좀 복잡하다. 마라타가 위기를 맞았던 1772년-1782년 동안, 무굴 제국은 [[미르자 나자프 칸]]이라는 걸출한 군사령관의 지휘 하에 마지막 부흥기를 맞고 있었다. 이 시기에 미르자의 지휘 하에 무굴 제국은 군사적 현대화를 이룩하고, 펀자브의 시크교도와 전쟁에 들어간다. 1779년에는 시크-로힐라 연합군을 물리치고 어느 정도 북인도에서의 영토적 지배권을 회복하였으며, 이때 남인도의 마이소르와 카르나타카 나와브도 무굴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1782년 미르자 나자프 칸이 사망하고 4명의 부관이 총사령관의 지위를 놓고 내분을 벌였는데, 영국과의 1차전을 끝낸 마하다지 신데가 이에 개입하여 4명의 부관을 제압하고 무굴의 내란을 진정시킨다. [[샤 알람 2세]]는 이에 따라 1784년 마하다지 신데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무굴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라지푸트와 펀자브를 영향권에 두는 등 북인도에서의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힌두교도가 무굴 제국의 최고위직을 겸하는 상황에 무굴 궁정의 이슬람교도가 반발했고, 1787년 랄소트 전투에서 라지푸트족의 암베르-마르와르 연합군에 마하다지 신데가 패배하자 마하다지는 무굴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실각한다. 1788년에는 과거의 로힐라족 세력과 연합한 무굴 제국의 독립파 장군 이스마일 벡의 항쟁이 일어났는데, 로힐라족의 굴람 카디르는 일시적으로 델리를 점령하고 마라타에 순종적인 [[샤 알람 2세]]를 폐위한 후 눈멀게 한다. 이에 무굴 궁정에서는 일시적 실각 상태였던 마라타의 마하다지 신데가 개입하여 이스마일 벡과 로힐라족을 분쇄하고, 델리 재점령 후 [[샤 알람 2세]]를 무굴 황제로 복위시킨다. 이에 따라 마하다지 신데는 다시 무굴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1790년에는 샤 알람 2세에게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를 무굴 황제의 대리인으로 임명하도록 한다. 한편 마라타는 인도 남부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마이소르 왕국|마이소르 술탄국]]의 세력과 대립에 들어가, 1770년대부터 간헐적인 전투를 벌였다. 초기의 국지전은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가 점령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발생한 1777년의 사운시 전투에서 꽤 큰 규모의 전투로 발전했는데, 하이데르 알리는 뛰어난 전술적 판단으로 마라타의 지휘관 콘헤르 라오(Konher Rao)를 죽이고 다른 지휘관 파두랑 라오(Padurang Rao)를 포로로 붙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마라타와 마이소르 간에는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으나, 1780년대에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마이소르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맺고 마이소르에 대항한 경계를 강화하자 마이소르의 티푸 술탄이 1785년 마라타를 침공하여 본격적인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이 시작되었다. 1787년까지 2년간 지속된 이 전쟁에서 티푸 술탄은 놀라운 지휘를 펼쳐 연전연승하였고, 마라타는 전체적으로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있었으나 마이소르의 국력 및 마이소르와 영국 세력 간의 적대 관계를 감안할 때 전쟁이 계속되면 최종적으로는 마라타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결국 티푸 술탄은 1787년 1월의 바하두르벤다 포위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둔 뒤 1787년 4월 가젠드라가드 조약을 맺어 마이소르가 마라타에 약간의 공물을 바치고 선대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냈다. 확실한 승리 없이 시간을 끌던 마라타는 예상한 것보다 적은 이득을 거둔 상황이었고, 결국 몇 년 후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90 ~ 1792) 때 영국 동인도회사, 하이데라바드 니잠 정권과 동맹하여 [[마이소르]]를 협공해 일부 영토를 점령해온다. 그러나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마이소르는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동인도회사의 세력만 강성해져 결과적으로 이는 마라타에 실책이 되었다. 1795년에는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다시 대립하여 카르다의 대규모 회전에서 승리하고 하이데라바드의 영토를 빼앗았는데, 하이데라바드는 지속적으로 친영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영국과 마라타의 관계는 다시 벌어지게 된다.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마라타의 전체적인 세력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니, 코친[* 1795년에 영국(동인도회사)이 네덜란드에서 접수해 보호국으로 만듦. 그 전에는 포르투갈(1503-1663),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63-1795)의 보호령이었음.], 하이데라바드[* 1798년에 보호국화되어 영국 주권 하의 인도 번왕국(princely state)이 됨], [[https://ko.wikipedia.org/wiki/%ED%8A%B8%EB%9D%BC%EB%B0%A9%EC%BD%94%EB%A5%B4_%EC%99%95%EA%B5%AD|트라방코르]][* 1795년에 군사보호조약을 맺고 번왕국이 됨. 1808-1809년에 짧은 반영 항쟁을 벌이긴 하나 패배.], 아와드[* 1801년에 군사보호조약을 맺고 번왕국이 됨], 카르나타카 나와브[* 1801년 카르나타카 조약에 의해 사실상 멸망하고 나와브 아짐 웃다울라는 명예직 나와브로 남게 됨. 죽을 때까지 막대한 연금을 받음.]를 길들이고 제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승리(1799)해 남인도, 동인도를 평정한 영국의 앞을 막아서는 중부 인도의 대세력은 이제 마라타가 유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